실내악의 계절
11월이다. 곧 수능을 볼 고3처럼 살고 있기에, 11월이 흘러가는 하루하루, 달력만 안타깝게 바라본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체험하고자, 하루가 지나면 달력에 붉게 X표를 친다. 모르고 지나보내는 날이 없게 하려고. 외출할 짬도 없는 이런 때에는 안개 아니면 구름 걸린 날이 좋다. 해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갈수록 눈 뜨는 시각이 빨라진다. 다섯 시쯤 일어나는 것은 괜찮은데, 오늘은 네 시부터 눈이 떠져서 한참 망설였다. 요즘은 일곱 시쯤 해가 뜬다. 캄캄한 아침에 뉴스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고, 컴퓨터를 켜고, 세수를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지금쯤 되어 창밖으로 출근하는 차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싶으면 벌써 피곤하다. 게다가 오늘은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다. 마음만 급하다. 무수히 들이켜는 커피에 머리도 몸도 장아찌처럼 전다. 이런 날은 최대한 진도를 잘게 나누어 한 단계 해치울 때마다 스스로 상을 주는 것도 괜찮다. 초컬릿을 한 조각씩 먹는다든지. 잘 될까, 오늘.

실내악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BBC 라디오를 듣다가 문득 '아' 하고 연주자를 확인하자 알반 베르크 쿼텟이었다. 베스트 앨범이 다 품절인데 알라딘에만 재고가 있기에 당장 샀다. 그러고보니 이웃 블로그에서 게반트하우스 쿼텟의 베토벤 사중주 세트 이야기도 보았는데... 아아. 아무리 생각해도 천재란 이런 디테일에 깃들어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도 천재였으면 좋겠다. 이 생각은 죽을 때까지 하겠지.

단편 '피라미드'는 정말이지 최고의 발란데르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렇게 우울하면서도 사랑스러울까.

'7시가 되자 그는 나설 준비를 마쳤다. 그는 기온이 0도에서 8도 사이일 때 입는 스웨터를 선택했다. 그는 다양한 온도에 맞는 스웨터들을 갖고 있고, 아주 까다롭게 골라서 입었다. 축축한 스카겐의 겨울에 춥게 나다니는 것은 질색이었고, 땀을 흘리는 것도 딱 짜증이었다. 그러면 생각하는 능력에 차질이 오는 것 같았다. 그는 경찰서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몸을 좀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밖으로 나서자 바다에서 불어오는 희미한 바람이 느껴졌다. 마리아가탄에서 경찰서까지는 십분이 걸렸다.'

귀엽다. 그리고 몇 쪽 뒤에 나오는 아래 문장을 보고 나는 그만 깔깔깔 웃어버렸다.

'발란데르가 현장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아침을 먹고, 어떤 스웨터를 입을 것인지 온도계와 상의했다. 어제와 같은 스웨터로 정했다.'

그런가하면, 지금 작업하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의 글에서 또 깔깔깔 웃어버린 대목.

'세계 다른 어디에도 여우원숭이는 없고, 마다가스카르에는 다른 원숭이는 전혀 없다. 40퍼센트의 역사 부인자들은 이런 현 상태가 대체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여우원숭이 37여 종이 똘똘 뭉쳐 노아의 방주 건널판을 건넌 뒤에 뒤도 안 돌아보고 마다가스카르로 행군했다는 것인가? 가는 중에 그 길고 넓은 아프리카 대륙 어디에도 한 마리의 낙오자도 남기지 않고?'

아마존이 벌써 2009년의 책 100권을 발표했다. 올해는 그다지 눈에 띄는 책이 없다. 사실 관심도 별로 없다. 그저 올해가 이렇게 착실하게 간다는 게 속상할 뿐이다. 바보처럼 또 나이만 먹는다.
by starla | 2009/11/05 08:53 | la dolce vita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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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당고 at 2009/11/05 11:36
아, 정말 실내악의 계절이에요. 실내악을 들으면 좀 따뜻해지는 기분이.
그런데 왜 눈 뜨는 시각이 점점 빨라지실까요? 전 점점 늦어지는데. 오늘은 11시에 일어났다는ㅠ_ㅠ 물론 늦게 자고, 술도 마셔서 더 그렇겠지만;
스트레스는 최소한으로, 상은 최대한으로, 오늘 진도 팍팍 나가시길 :)
Commented by starla at 2009/11/05 15:07
그쵸그쵸? 왜 그럴까요?
하긴 생각해보면, 가을에는 오케스트라도, 콘체르토도, 다 어울리긴 하네요.

저는 되게 일찍 자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게 당연하긴 한데
(막 자랑스럽다가도 자는 시간을 세어보면 엄청남 -_-;)
어쩐지 점점 빨라지네요. 몸이 업무에 협조해주는 것일까요???

당고님도 스트레스는 최소한으로! :D
Commented by Lucida at 2009/11/05 11:48
실내 惡으로 읽은 나. 내 머리에 이상한 괴물이 살아요~ 악.
Commented by starla at 2009/11/05 15:07
푸하하하;;; '괴물들이 사는 나라' 보며 스트레스 좀 푸셔야겠습니다.
실내 惡이라니, 뭘까 ㅠ_ㅠ
먼지가 실내 악이죠. ㅋㅋㅋㅋㅋ
Commented by 팔다 at 2009/11/05 23:24
ㅎㅎ 윗분, "실내 惡" 넘 귀여우셔요 ~

흐음...진도를 잘게 쪼개어서 하나 끝날때마다 상을 주는 방식 좋네요.. 오늘 나는 페이퍼 한 문단 쓸 때마다 땅콩 들어있는 M&Ms 초콜렛을 한알씩 먹을 테여요!! (그렇다면, 초콜렛 작은거 한봉지를 다 먹기 전에 페이퍼를 끝낼 수 있다는!)
Commented by starla at 2009/11/06 05:48
옷, 당연히 팔다 양도 그렇게 할 줄 알았더니! 헤헤~

알겠지만, 유인을 적절히 설정해야해.
너무 자주 먹도록 허락하면 페이퍼 쓰는 데 도움이 안 되고,
너무 드물게 먹도록 허락하면 유인이 안 되서 또 도움이 안 되고,
딱 지겨울 정도만, 하지만 절대로 먹지 않고 참을 수 있는 정도로만 간격을 설정;;;

흐흐흐.

난 덕분에 어제 성공리에 방어했으니, 팔다도 힘내!!!
Commented by cesia at 2009/11/05 23:44
나름(?) 가을을 잘 보내시고 계시는 듯.. 파이팅!

(도킨즈의 책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이지만. ^^)
Commented by starla at 2009/11/06 05:49
나름(!) 잘 보낸다는 생각, 저도 동감입니다. 후후후.
도킨스는 늦어도 올해는 확실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셔요.
잠시 눈물 좀 닦고... 일하러... ㅠ_ㅠ
Commented at 2009/11/07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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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tarla at 2009/11/09 06:33
나도 늘 진도에 비해 상이 과해; 허허허허허;
다행히 초컬릿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초컬릿은 늘 남지만...
Commented at 2009/11/07 09:2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tarla at 2009/11/09 06:34
아이고, 정신이 없어서 한참 (블로그에) 놀러가지도 못했네요.
그런데 마무리 중이시라니 우앙 ;ㅁ;
축하합니다.
그리고 정말 빠르시네요!
어떤 책일지 정말정말 궁금해요.
Commented at 2009/11/08 20:3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starla at 2009/11/09 06:35
아니여요~
제가 좀 헷갈리게 적어서 그래요!

저자 이름이 '헤닝 만켈'이구요, 책 제목은 <하얀 암사자> <방화벽> <미소지은 남자> <한여름의 살인> 등입니다. <한여름의 살인>이 괜춘하지요;;; 저야 다 좋지만...

책에는 쿠르트 발란더 라고 되어 있는데, 발란데르가 옳다고 하더라고요.
어서어서 중년탐정의 매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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