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딱 좋지 - 보자르 트리오의 스튜디오 녹음

보자르 트리오의 필립스 녹음 전집에 수록된 툴리 포터의 해설 번역

보자르 트리오 필립스 녹음 전집 [60CD 한정반]

글: 툴리 포터Tully Potter

3은 늘 신비로운 숫자였지만, 음악적 앙상블에서만큼은 어쩐지 모호한 느낌을 띤다. 듀오의 개념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음악가가 때로는 함께, 때로는 맞서서 연주한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사중주에는 협동의 분위기가 감돈다. 사중주가 잘 되려면 모두가 한 방향으로 끌어야만 한다. 하지만 삼중주라고? 그 구성원들은 서로 협동하는 걸까, 대결하는 걸까?

초기의 피아노 삼중주 작곡가들에게는 단순한 해법이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피아노 소나타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더한 것뿐으로, 가정에서 연주하기 위한 작품이었고 피아니스트가 전체 분위기를 좌우했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완벽하게 연마하는 전문적 삼중주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베토벤은 세 파트에 동등한 무게를 준 곡을 씀으로써 폭을 상당히 넓혔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 연주자가 특별한 계기에만 한자리에 모인다고 여겼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이윽고 체르니아프스키Cherniavsky 트리오가 등장했다. 미셸, 레오, 얀 체르니아프스키 형제로 구성된 트리오는 20세기 들어설 무렵 오데사에서 첫 연주회를 열었을 때 겨우 여덟 살, 아홉 살, 열한 살에 불과했다. 그들은 세계 순회 공연을 통해서 당시로서는 아직 변방이었던 남아프리카,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까지 유명해졌고, 그 선례를 쫓아서 다른 신동 트리오들도 등장했다. 가령 콤핀스키Compinsky 트리오와 캐나디언Canadian 트리오도 형제자매로 구성되었으며, 트리에스테Trieste 트리오는 수십 년 동안 모든 레퍼토리를 암보로만 연주했다.

그러나 뉴욕의 보자르 트리오Beaux Arts Trio of New York야말로 피아노 삼중주에 새로운 기준을 설정했다는 것, 이들이야말로 피아노 삼중주를 최고의 현악 사중주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켰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는 중론이다. 그런데 반 세기 넘게 이어질 이들의 경력은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삶에서 좋은 것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트리오는 거의 우연히 시작되었다.

그 주동자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길레비치(Danial Guilevitch, 1899-1990)였다. 러시아 로스토브나도우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에서 자라고 배웠던 길레비치는 마르셀 샤이에Marcel Chailley의 사중주단에서 연주했고, 1928년부터는 조제프 칼베Joseph Calvet가 이끌었던 그 이름난 사중주단에서 연주했다. 그러다가 독일이 침략해 들어오기 직전인 1940년에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왔고, 성을 길레Guilet로 줄인 뒤 자신이 꾸린 사중주단과 토스카니니의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그리고 1954년에는 모차르트 피아노 삼중주를 녹음하기 위해서 자신보다 어린 두 동료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Menahem Pressler, 독일 마그데부르크 출생, 1923-)는 자신의 활동 기반이었던 이스라엘로 잠시 돌아가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한 번 불꽃이 일었고 세 사람은 – 첼리스트는 미국 뉴저지 뉴어크 출신으로 카살스의 제자였던 버나드 그린하우스(Bernard Greenhouse, 1916-2011)였다 – 이듬해에 다시 모여 새롭게 출발했다.

세 사람은 자신들을 길레 트리오라고 부르는 대신, 뉴욕 보자르 트리오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결정했다. 사실 이 이름은 이디스 실러Edith Schiller, 유디스 샤피로Eudice Shapiro, 버지니아 피터슨Virginia Peterson이라는 썩 괜찮은 라인업이 1930년대부터 썼었지만 당시는 이미 해체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1950년부터 뉴욕 필하모닉의 주자들이 보자르 사중주단이라는 훌륭한 팀을 결성해서 연주하고 있기도 했다. 아무튼 뛰어난 프랑스 피아니스트 로베르 카자드쉬가 세 사람에게 자신의 음악실에서 연습하라고 했고, 카자드쉬와 함께 소나타를 연주하는 파트너였던 지노 프란체스카티도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니 이제 이들에게는 이름도 있었고 유력한 친구들도 있었다. 문제는 일거리가 없다는 거였다.

그러던 중 행운이 찾아왔다. 매사추세츠 레녹스의 탱글우드 뮤직센터에서 열릴 버크셔 페스티벌에 참가하기로 했던 알베네리Albeneri 트리오가 공연을 취소했던 것이다. 1955년 7월 13일, 보자르 트리오는 이 유서 깊은 여름 축제에서 데뷔 무대를 가져, 베토벤의 Op. 1/3, Op. 70/1, 그리고 Op. 97 “대공”을 연주했다. 당시 탱글우드 상주 오케스트라인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하던 샤를 뮌슈는 원래 공연 전반부에만 참석하기로 했지만 결국 끝까지 다 들었다고 한다. 애초에 트리오는 공연 계약이 몇 건만 이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곧 소문이 퍼졌고 이들의 에이전트는 쇄도하는 공연 요청에 파묻힐 지경이 되었다. 결국 그들은 1955-56년 시즌에 80일이나 연주하게 되었고, 1956년 1월 22일에는 프릭 컬렉션에서 수수한 뉴욕 데뷔 무대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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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는데도, 처음 몇년 동안 그들은 생계를 위해서 피곤하기 짝이 없는 “동네 연주회” 투어를 다녀야 했다. 지방 음악계는 다양한 연주자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계획에 곧잘 넘어갔다. 이번 주에는 소프라노, 그 다음 주에는 기타리스트, 그 다음 주에는 챔버 오케스트라,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보자르 트리오, 하는 식이었다. 에이전트는 확보된 청중에게 자신이 보유한 연주자들을 들려줄 수 있어서 좋았고, 연주자들은 비록 큰 퍼센트를 에이전트에게 떼어줘야 했지만 약간의 돈을 보장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딜 가든 보자르 트리오는 삼중주를 두 곡 연주하고는 독주, 이중주, 앙코르곡까지 곁들여야 했다.

그 초기에 그들은 현대음악을 꽤 많이 연주했다. 1958년에는 독일 출생으로 힌데미트의 제자였던 베른하르트 하이덴Bernhard Heiden의 삼중주를 의회도서관에서 성공리에 초연했고, 1960년에는 에런 코플런드의 ‘비쳅스크Vitebsk’를 뉴욕 타운홀에서 연주했으며, 1961년에는 러시아 출생의 보리스 쿠첸Boris Koutzen의 예순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저드슨홀에서 열렸던 공연에서 그의 삼중주를 연주했다. 그리고 1965년에는 데이비드 다이아몬드David Diamond의 쉰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헌터칼리지의 플레이하우스에서 열렸던 공연에서 그가 1951년에 작곡했던 삼중주를 아주 뒤늦은 뉴욕 초연으로 공연했다. 심지어 1958년에는 로이 해리스Roy Harris에게 삼중 협주곡 작곡을 위촉하려고도 했지만, 결국 소득은 없었다.

트리오는 헌터칼리지, 타운홀, 카네기홀, 그리고 미국의 여러 여름 축제에서 단골로 출연하게 되었다. 탱글우드, 라비니아, 벤트너, 그리고 우드스톡의 매버릭 콘서트에도 참가했다. 1958년에는 해외로도 진출했다. 그러나 런던 데뷔 공연의 장소를 실수로 그만 거대한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잡는 바람에, 관객이 150명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 1960년에 트리오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초청되었고, 그곳에서 연 세 번의 연주회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러고서 이듬해 1월에 다시 런던으로 왔을 때는 이제 신중하게도 좀 더 작고 음향이 좀 더 알맞은 위그모어홀을 잡아서 두 차례 연주회를 가졌다.

그 시절에 트리오의 레퍼토리는 주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에 할애되었고 드보르작의 “둠키”나 차이콥스키를 가끔 추가했다. 베토벤 트리오를 처음 완주한 것은 1963년 헌터칼리지에서였다. 하지만 그들의 프로그램에 제일 자주 등장했던 작품은 바로 라벨의 A단조 트리오였다. 길레는 모리스 라벨을 잘 알았고, 그 작곡가와 함께 듀오로 프랑스 순회 공연도 했었다. 그런 그가 동료들에게 라벨의 특별하고 미묘한 특징들을 세세히 지도해주었고, 그 결과 마법과도 같은 해석이 탄생했다. 그린하우스는 사위이자 트리오에 관한 책을 쓴 니컬러스 델반코Nicholas Delbanco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라벨을 아마 천 번은 연주했을 거야. 하지만 매번 신선함을 유지해야 했지. 유일한 방법은 리허설을 활용하는 건데, 리허설에서 그 작품을 새롭게 해석할 방법을 찾아보는 거야.”

길레는 가브리엘 포레와도 아는 사이였고, 그 작곡가의 섬세한 리듬을 약동감 있게 유지하는 비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길레보다 더 젊은 두 연주자에게도 나름의 통찰이 있었다. 프레슬러가 팔레스타인/이스라엘에서 배웠던 스승들 중에는 막스 폰 파우어Max von Pauer와 페루초 부소니Ferruccio Busoni의 제자들이 있었다. 미국에 와서도 그는 역시 부소니를 사사했던 두 사람에게 배웠는데, 바로 에곤 페트리Egon Petri, 그리고 쇤베르크의 친구이기도 했던 에두아르트 슈토이에르만Eduard Steuermann이었다. 한편 그린하우스는 카살스뿐 아니라 펠릭스 샐먼드Felix Salmond와 에마누엘 포이어만Emanuel Feuermann에게도 배웠고, 방대한 첼로 레퍼토리를 연주한 경험이 있었다.

이들의 1963년 위그모어홀 연주회 직후, <타임스>의 비평가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피아노 삼중주가 실내악 가운데 가장 다루기 힘든 형식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뉴욕 보자르 트리오가 모차르트, 라벨, 브람스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그런 견해가 적잖이 바뀌었다… 모차르트의 B플랫 삼중주 K502에서 연주자들은 자신들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 팀임을 증명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세 대의 악기가 아니라 하나의 악기를 연구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주었다. 프레이징, 어택, 다이내믹은 완벽한 통일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은 두 현악기와 건반 사이의 음색 균형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피아노 삼중주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인데, 이들은 너무도 탁월하게 계산된 균형을 보여주었다.”

내가 보자르 트리오의 연주를 처음 들은 것은 1960년대 초 요하네스버그에서였다. 나이 차이가 두드러졌던 연장자 길레는 꼭 레몬처럼 자글자글 주름진 얼굴이었고 바이올린 음색은 아주 프랑스풍이었는데, 가끔은 그 음색에서마저 레몬즙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그는 분명 탁월한 연주자였다. 한편 그린하우스는 첼로를 훌륭하게 연주하는 데만 온통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레슬러는 그때부터 이미 숨길 수 없는 개성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기 손가락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유심히 듣는 것처럼 건반으로 상체를 숙이고 있었고, 꼭 금붕어처럼 아니면 동그란 담배 연기를 내뿜을 것처럼 입을 오물거렸는데, 어쩌면 건반에서 좀 더 아름다운 소리를 끌어내기 위해서 자신을 다그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간간이 동료들을 돌아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동료들에게 좀 더 긴밀한 앙상블을 촉구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가 동료들의 연주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 자신의 스타인웨이가 동료들의 좀 더 섬세한 소리를 가리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1969년에 일흔이 된 길레가 은퇴했다. 남은 두 사람은 길레를 대신할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반 갈라미안Ivan Galamian의 제자이자 슈나이더 사중주단과 줄리어드 사중주단에서 연주했던 이시도어 코언(Isidore Cohen, 1922-2005)을 선택했다. 코언을 맞이하여 트리오의 레퍼토리는 폭이 더 넓어졌고, 비올라 주자 브루노 주란나Bruno Giuranna나 새뮤얼 로즈Samual Rhodes 같은 친구들이 가세하여 피아노 사중주와 오중주도 연주하게 되었다. 1987년에는 그린하우스가 은퇴했고, 1992년에는 코언도 마지막을 선언했지만, 프레슬러는 조금도 줄지 않은 열정으로 여러 젊은 연주자들을 끌어들여 보자르 식 연주를 이어갔다. 결국 2008년에 트리오를 해산한 뒤에도 프레슬러는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듯 지금까지 계속 실내악을 연주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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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원년 멤버가 모인 이유였던 녹음은 보자르 트리오에게 늘 중요한 작업이었다. 하이든과 멘델스존을 담았던 1957년 음반에 대해 <뉴욕 타임스>의 권위 있는 비평가 해럴드 C. 숀버그Harold C. Schonberg는 “괴로울 정도로 딱딱하고 가식적”이라며 혹평했지만, 나는 사실 그 녹음이 제법 괜찮았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도 직접 듣고 판단해볼 수 있다. 유명한 “집시” 론도가 포함된 하이든의 그 삼중주 녹음이 역시 1957년에 발매되었던 라벨과 포레의 녹음과 함께 이 전집의 보너스 음반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라벨 같은 단골 레퍼토리들은 길레의 녹음과 코언의 녹음이 둘 다 있으므로, 여러분은 서로 다른 버전의 장단점을 따지면서 무한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보자르 트리오의 가장 굵직한 프로젝트는 하이든 피아노 삼중주 전곡 녹음이었다. 원래 음반 한 장으로 시작된 일이었으나 그들은 감히 전곡에 도전했고, 그럼으로써 수많은 감상자에게 그야말로 순수한 즐거움을 제공했다.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도 보자르 트리오의 장기였다. 그들은 전 세계에서 여러 악단과 지휘자와 함께 이 곡을 연주했고, 이들의 녹음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클라라 슈만의 Op. 17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기뻐할 사람은 페미니스트들만은 아닐 것이며, 객원 연주자와 함께한 녹음 중에서는 슈베르트의 “송어”뿐 아니라 베토벤과 브람스의 클라리넷 삼중주도 있다는 점이 기쁘다.

한편 모차르트의 멋진 피아노 사중주들을 녹음할 때는 브루노 주란나의 설득에 넘어가 두 곡 모두 1악장에서 반복을 지켰는데, 이것은 아르투르 슈나벨이 G단조 사중주에서 반복을 지키겠다고 HMV를 꾀어서 결국 78회전 음반을 한 장 더 써야 했던 때 이래 처음이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경고해둘 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들이 쇼스타코비치의 2번 삼중주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이 녹음이 이뤄진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70년에 녹음한 차이콥스키의 삼중주에서 괘씸하게도 변주 중 푸가를 누락했다는 점이다.

미국 음악을 대표하는 것은 찰스 아이브스가 1911년에 작곡한 삼중주로, 1955년에 발표된 이 곡을 보자르 트리오는 1966년부터 레퍼토리에 받아들였다. 이 삼중주의 스케르초 악장은 제목이 “TSIAJ – 프레스토”인데, “TSIAJ”는 “This Scherzo Is A Joke(이 스케르초는 농담입니다)”의 두문자어다. 이 악장에는 유명한 뮤직홀 노래 “타-라-라 붐-드-예이”의 가락이 등장하기 때문에, 신성한 분위기가 감도는 클래식 공연장에서도 보통 웃음이 터지기 마련이다. 나도 런던의 퀸엘리자베스홀에서 온 청중이 킥킥 웃음소리를 내는 것을 경험했다.

1993년에는 프레슬러, 이다 카바피안Ida Kavafian, 피터 와일리Peter Wiley의 라인업이었던 트리오가 ‘봄의 음악’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으로 투어를 했는데, 네드 로렘Ned Rorem, 데이비드 N. 베이커David N. Baker, 조지 로크버그George Rochberg 같은 미국 작곡가들이 트리오를 위해서 쓴 신작들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다행히 그 연주가 녹음되었으므로, 현대 작곡가들 중에서도 좀 덜 괴상한 작곡가들에 대해서는 보자르 트리오가 충분히 공감했다는 증거가 되어준다.

이 음반들 중 대다수는 스위스 라쇼드퐁의 음악당에서 녹음되었다. 그곳은 실내악 녹음에 알맞은 환경으로, 이탈리아노 사중주단도 그곳에서 녹음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폴커 스트라우스Volker Straus가 많은 녹음에서 제작을 담당했다. 어느 각각의 연주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연주들 전체가 어마어마한 위업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모두에게 값진 연주들이다.



헨닝 망켈 (1948.2.3~2015.10.5) 가디언 부고 기사

<가디언>에 실린 헨닝 망켈의 부고 기사를 번역해보았다. 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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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닝 망켈 부고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로 유명하며 헌신적인 정치적 활동가였던 스웨덴 범죄소설 작가, 사망하다.



67세로 사망한 헨닝 망켈은 지난해 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전 세계가 스웨덴을 범죄소설가의 이상적 디스토피아로 여기도록 만드는 일을 거의 혼자서 해낸 작가였다. 그는 범죄소설을 좌파적 사회 비판 도구로 활용하는 스웨덴의 기존 전통을 따른 작품들로 세계가 그 전통에 주목하도록 만들었고, 멜랑콜리한 술꾼에다 고지식한 형사 쿠르트 발란데르를 통해 주변 세상에 메아리치는 당황스러운 패배의 기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을 그려냈다.

망켈의 어조는 첫 발란데르 소설인 <얼굴 없는 살인자들>(1991) 중 형사가 살인 현장을 발견한 장면에서 이미 완벽하게 드러나 있다. "발란데르는 자신을 떠난 아내를 떠올렸고, 어디에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짐승 같은 살인이로군, 그는 생각했다. 운이 나쁘다면 이중 살인일 수도 있었다."

현대 소설의 주인공들 중에는 신산한 고초를 겪으면서 녹초가 되는 중년의 남성 형사가 발란데르 말고도 더러 있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이언 랜킨이 창조한 형사 리버스일 것이다. 그러나 발란데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사례였을 뿐 아니라 아마도 가장 성공한 사례였을 것이다. 발란데르가 처음 등장한 시점은 스웨덴이 1960년대와 70년대의 낙관적인 유토피아주의로부터 급작스레 철수한 시기였으므로, 주인공의 타락과 부패는 주변 사회의 타락과 부패에도 반영되었다.

리버스의 에든버러는 애초에 한 번도 반짝거린 적 없었던 도시인 데 비해, 발란데르는 이제 엉겅퀴 무성한 폐허가 되어버린 낙원을 마치 당나귀 이요르처럼 우수 어린 태도로 헤치고 나아갔다. 결국 그것은 놀랍도록 인기 많은 여정이 되었다. 처음에 인기를 얻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12권의 발란데르 소설들은 (이 중에는 단편집이 한 권 있고, 발렌데르의 딸 린다가 주인공인 소설도 한 권 있는데 거기에도 발란데르가 등장한다) 결국 전 세계에서 여러 언어로 4천만 권이 팔렸다. 스웨덴에서는 소설 캐릭터에 기초한 텔레비전 드라마가 두 차례 제작되었고, 드라마들은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었다. 케네스 브래너가 주역을 맡은 BBC 각색판을 비롯하여, 두 시리즈 모두 전 세계에 팔렸다.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발란데르는 점점 더 비참해지는 것 같다. "경찰서에서 스트레스투성이에 울적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한때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가구들은 자신들을 방치하는 그를 나무라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발란데르는 마지막 소설 <불안한 남자>(2009)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데, 더구나 이 소설에서 그는 치매로 기억력을 잃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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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범죄소설, 나아가 노르웨이 범죄소설이 남성들을 위한 일종의 도피문학으로서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성공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경찰 일이 철저한 노동조합을 갖춘 직종으로서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몇 안 되는 직업이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공이 심각한 위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잘릴 위험이 없다는 점이다. 사실은 심각한 위법 행위를 저지르더라도 그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정말로 죄가 있는 경우는 결코 없지만 말이다. 낙관적인 1960년대에 제임스 본드는 살인 면허를 소지했다는 점에서 다른 중년 남성들과 차별화되었지만, 1990년대의 환상적 영웅으로서 경찰관에게는 직업을 지킬 면허가 있다. 세계화가 불러온 경제적 소용돌이 속에서 이것은 수많은 좌절한 중년 남성들에게 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망켈 자신은 한 번도 좌절한 중년 남성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의 삶은 십대 때 선원이 된 순간부터 늘 부단히 에너지가 들끓는 삶이었다. 그는 변호사였던 이바르 망켈의 아들로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잉리드는 그가 태어난 다음 해에 가족을 떠났다. 훗날 망켈은 어머니의 결정에 대해서 "그냥 많은 남자들이 하는 일인걸요"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베그라는 벽촌으로 이사했고, 망켈은 그곳의 법원 윗집에서 살다가 13살에 보로스로 다시 이사했다. 남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내려와 예테보리 근처에 있는 보로스는 스베그보다는 덜 지루할 수 있는 마을이었다.

그 시절에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자신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하는 상상 속의 어머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는 상상이 현실만큼 귀중할 때 일이 제일 잘됩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이 지극히 행복했다고 회상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의 스웨덴은 세상에서 아이로 살기에 가장 좋은 장소 중 하나였다.

보로스에서 3년을 지낸 뒤 그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떠났다. 처음에는 파리로 갔다가, 다시 바다로 나가서 화물선에서 일했다. 그는 그 일을 사랑했다. 1966년에 그는 파리로 돌아와 보헤미안처럼 살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68년 학생 시위로 이어진 소요 사태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무대 담당자로 일하기 위해서 스톡홀름으로 돌아왔다. 그때 첫 희곡을 썼는데, 스웨덴 식민주의에 관한 내용이었다. 1973년에는 스웨덴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첫 소설을 출간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는 그에게 제2의 고향처럼 느껴졌고, 그는 이후 작가로 성공하여 여건이 갖춰지자 아프리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1986년부터 모잠비크에 극단을 세우고 운영했다. 아프리카는 세상의 불평등에 대한 그의 분노를 더 깊게,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는 에이즈와 지뢰에 대응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에이즈 치료제를 구할 여력이 없는 지역에서는 죽은 사람들의 삶과 투쟁이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구전 역사 기록 프로젝트를 장려했다. 그는 언젠가는 알렉산드리아에 새로 지어질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그 구전 역사를 읽게 될지도 모른다고 꿈꿨다.

"아프리카에서 나는 세상에 쓸모없는 고통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걸 내일 당장이라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는 데 드는 비용은 서구 세계가 애완견 사료에 쓰는 비용만큼도 안 될 겁니다." 그는 말했다.

작가로서 그의 삶은 소설 쓰기와 연극 일에 반반씩 투자되었다. 그는 대단히 많이 쓰는 작가로, 일 년에 세 권까지 내기도 했다. 설령 그 작품들의 질은 고르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 이면에는 틀림없이 열정과 관용이 깔려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들에 대해서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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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란데르는 망켈이 모잠비크에서 오래 체류하고 돌아온 후에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때 그는 스웨덴이 1960년대보다 훨씬 더 인종차별적인 나라가 된 것을 감지했다. 1960년대에는 스칸디나비아 밖에서 유입된 이민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시리즈의 3번째 책 <하얀 암사자>(1993)로 스칸디나비아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전에 망켈은 낙관적인 좌파 정치에 전념한 시절이 있었다. 파리에서 스톡홀름으로 돌아온 뒤에는 베트남전쟁과 대학 체제에 반대하는 1968년 시위에 가담했고, 1970년대에는 노르웨이에 오래 머물면서 그의 파트너가 소속되어 있던 마오주의 집단의 주변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니 그는 전후에 부풀었던 희망과 번영의 거품이 꺼지고 난 뒤 찾아든 충격과 실망을 누구보다 잘 경험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스웨덴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그 일을 더 일찍, 더 격렬하게 겪었다. 좋았던 시절에 스웨덴에서 거품이 남들보다 더 일찍, 더 거대하게 부풀었던 탓이었다.

망켈의 소설들은 대개 20세기 스웨덴의 진보적 미의식을 구성한 통념이라 할 요소들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요컨대 부자는 늘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인종이라는 것, 기독교는 사악하지만 평범한 대중의 범속한 품위는 믿음직하다는 것, 기존에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들은 마치 은밀하게 자라고 있는 궤양을 가려 덮은 회반죽처럼 그 아래에 반드시 진정한 성질을 감춘 채 그것을 오염시킨다는 것. 종종 해외에서 좀 더 개방적이고 정직한 사회를 찾을 때도 있다.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소설들에서는 그것이 소련의 통치를 받는 동유럽이다. 또한 이런 책들은 성적으로 극심한 비관주의를 드러낸다. 침대를 공유하는 상대들보다는 사무실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큰 행복과 진정한 우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쾌활함이 솟아오른다. 스웨덴 느와르에는 허무주의는 거의 없다. 선과 악은 늘 선명하게 구분되는데, 그 점은 이 장르에서 만화적인 정점을 이룬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 살란데르 삼부작까지 줄곧 이어진다. 주인공들의 문제는 이제 선이 스웨덴의 현 상태와 깔끔하게 부합하지 못한다는 데 있을 뿐이다. 아직도 어딘가에 선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악은 만화적인 악당들에게 굳게 박혀 있어, 우리를 안심시킨다. 덕분에 이 장르는 끔찍한 범죄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안심시킨다는 범죄소설의 전통적 기능을 여전히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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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켈은 발란데르가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별달리 더 느긋해지지 않았고, 국제 문제에 관한 활동도 줄이지 않았다. 그는 지뢰로 두 다리를 잃은 아프리카 소녀가 고군분투 성장하는 이야기를 삼부작으로 써냈다. 어느 중국인이 19세기에 미국에서 자신의 선조들을 가혹하게 다뤘던 자들의 후손을 찾아 외딴 스웨덴 마을로 와서 그 복수로 일가를 학살하는 이야기도 소설로 썼다.

망켈은 친팔레스타인 시각을 견지하여, 이스라엘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비유하면서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0년 가자 봉쇄를 뚫으려고 나선 구호선 중 한 척에 탔다가 이스라엘 특공대에게 붙잡힌 적도 있다. 말년에는 감시국가를 염려했으며, 디지털 기술이 개인은 좀 더 투명하게 만드는 데 비해 정부와 기업은 좀 더 은밀하게 작동하도록 해준다고 경고했다.

망켈은 재산의 일부를 여러 사업에 기부했다. 모잠비크의 어린이 마을에 기부했고, 스웨덴에서 정치적 연극에 주는 상을 제정했으며,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스웨덴 북부 지방에 관한 글들을 대상으로 한 상도 만들었다. 그가 자란 작은 마을 스베그에는 그를 기리는 박물관이 그의 생전에 지어졌다. 그는 그 마을 외곽에 집을 한 채 구입하여 조용한 작업 공간이 필요한 작가들과 극작가들이 사용하도록 기부했다.

망켈의 사생활에서도 그의 공적인 활동에서 드러났던 들끓는 에너지가 언뜻 엿보인다. 그는 네 번 결혼했고, 여러 상대와 네 아들 토마스, 마리우스, 모르텐, 욘을 두었다.

1998년에 그는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딸인 에바 베리만과 결혼했다. 그녀가 그의 유족이다.

헨닝 망켈, 범죄소설가, 1948년 2월 3일 태어나 2015년 10월 5일 사망하다.

-앤드루 브라운, 2015년 10월 5일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How We Do It - 로버트 마틴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로버트 마틴 지음, 김홍표 옮김 / 궁리

성과 생식은 인간의 모든 활동 중에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인간이 동물로서의 뿌리 깊은 본능에 따라 행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구태여 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때가 되면 알아서 하기 마련이라는 통념이다. 반면 인간의 성은 다른 동물과는 퍽 다르다는 통념도 있다. 동물은 동성애를 하지 않는다느니 가임기가 아닐 때도 성교하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느니 하는 주장은 타락한 문명에 의해 왜곡되어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성 풍습을 비판하는 데 쓰이곤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인간의 성과 생식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놀랍도록 적게 안다. 인간생식생물학은 역사가 짧거니와 개입에 의한 실험이 어렵다. (이유야 다들 알리라.) 친척인 영장류를 비교 연구하여 진화적 관점에서 살펴보거나 발생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연구도 오래되지 않았다. 이런 연구는 호기심 차원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 생식기에 관련된 의학적 문제를 극복하는 데도 중요하고, 안전한 피임과 효율적 불임 치료라는 상반된 양대 목표를 달성하는 데도, 즐거운 성생활을 누리는 데도 중요하다.

로버트 마틴은 이 분야의 권위자이고,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는 일반인을 위한 이 분야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정자와 난자부터 생리, 짝짓기와 임신, 출산, 수유, 신생아 양육, 피임과 인공 생식까지 인간이 어떻게 수태되고 태어나는지를 그야말로 종합적으로 다루었는데(더구나 많은 영장류, 포유류, 조류의 사례도 소개된다), 흔한 생식기 단면도나 생리 주기 도표 한 장 삽입하지 않았는데도 지루할 틈 없다. 저자는 주요 연구들을 인용하면서 그 방법론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모호하거나 이율배반적인 결과는 얼버무리는 대신 우리의 지식이 아직 이 수준이라고 밝히며, 몇몇 주제에서는 자신이 전문가로서 제안하는 가설을 소개한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것 못지않게 잘못 알았던 '상식'이 많이 깨진다. 생리 주기 한중간쯤인 배란기 전후가 가장 임신하기 좋은 시기라는 통념은 의심스럽다. 정자가 자궁경부에 저장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생리 직후 초기 2주가 더 가능성이 높을지 모른다. 은폐된 배란이 인간만의 특성이라는 것도, 인간의 침습성 태반이 진화적으로 가장 발달한 형태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문제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생리는 왜 진화했는지, 인간은 왜 다른 포유류처럼 자궁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지, 입덧은 왜 하는지, 젖을 얼마나 물리는 게 자연스러운지, 우리는 모른다. 하긴 정확한 임신 시점을 알 수 없어 출산 예정일을 앞뒤 2주까지 폭넓게 잡는 게 현재 우리의 한계가 아닌가.

사실 오늘날 성과 생식은 피임과 출산 보조 기법의 발전, 극적으로 감소한 여성의 평생 출산 횟수 등으로 몇 세대 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양상이 달라졌다. 그중 무엇이 상수이고 변수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그에 따라 바람직한 개입을 정하기 위해서 꼭 읽어볼 책이다. 영미 아마존 서점의 독자 서평들 중 4분의 1가량이 생물학자, 인류학자, 산부인과 의사 같은 업계 내부자들의 글인 것이 재미있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고, 그들이 하나같이 책의 정확성을 칭찬하며 자신도 몰랐던 내용을 배웠다고 말하는 경우는 더욱더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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